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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중세시대의 과학기술, 신앙과 이성의 조화 속에 꽃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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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과학기술은 흔히 암흑기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의 토대를 닦은 중요한 시기였다. 기독교 신앙과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산, 이슬람 문명의 영향이 융합되면서 유럽의 과학기술은 나름의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중세 후기에는 대학을 중심으로 자연철학과 논리학이 발달하고, 실험과 관찰을 통한 지식 탐구가 시도되었다. 중세의 과학기술은 근대 과학혁명의 기반이 된 위대한 유산이었다.

중세 과학의 배경

기독교 세계관과 과학

중세 서유럽 사회를 지배한 기독교 세계관은 과학 발전에 장애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자연에 대한 이성적 탐구를 정당화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다만 자연이 신의 피조물인 만큼, 자연법칙은 신의 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보았다. 기적과 초자연적 현상을 인정한 것이다. 중세 科學者들은 信仰과 理性의 조화를 모색했다.

고대 유산의 계승

중세 유럽의 과학기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출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갈레노스의 의학 등이 중세 초기부터 연구되었다. 이들 고전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승되었고, 중세 과학의 토대가 되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 권위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자연 탐구를 제약하기도 했다.

이슬람 문명의 영향

8-13세기 이슬람 세계는 과학기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바그다드와 코르도바 등 대도시에서는 그리스와 인도, 중국 등 고대 문명의 유산이 집대성되었다. 알 호레즈미와 이븐 시나, 이븐 루슈드 등 무슬림 학자들은 수학, 천문학, 의학, 광학 등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12세기 이후 아랍 학문이 유럽에 유입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이 재발견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수학과 물리학

인도-아라비아 숫자의 도입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로마 숫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계산에 불편함이 많았다. 13세기경 이탈리아 상인들이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하면서 산술 계산이 훨씬 수월해졌다. 피보나치는 『산반서』에서 십진 기수법과 산술 기호를 체계화했다.

대수학의 발달

중세 후기에는 대수학이 크게 발전했다. 프랑스 수학자 비에트는 문자 기호를 도입하여 방정식을 일반화했다. 이탈리아의 카르다노와 페라리, 영국의 해리엇 등은 3차, 4차 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했다. 이는 데카르트와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 대수학의 토대가 되었다.

기계학의 시작

중세에도 건축과 토목, 군사 기술 등에 역학 지식이 적용되었다. 13세기 말 영국의 수학자 브래드워딘은 속도 개념을 정립하고 중력 가속도 법칙을 예견했다. 14세기 프랑스의 부리당은 운동량 보존 법칙을 발견하는 등 근대 역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천문학과 항해술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의 영향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체계화한 천동설은 중세 내내 유럽 천문학의 토대였다. 그의 저서 『알마게스트』에서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고 행성들의 운동을 설명했다. 아랍 천문학자들도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받아들여 천체 관측과 역법 계산에 활용했다.

천문 관측 기기의 발달

중세에는 다양한 천문 관측 기기가 발명되거나 개량되었다. 아스트로라베와 구좌의, 천구의 등이 대표적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교한 천문 관측 기록을 남겼는데, 울룩 벡이 제작한 사마르칸트의 천문대가 유명하다. 티코 브라헤 등 근대 천문학자들도 이들 관측 기기를 활용했다.

나침반과 항해술

중세 유럽의 항해술 발달에는 이슬람과 중국 문명의 영향이 컸다. 나침반은 11세기경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항해용 천문 관측 기구인 카말은 아랍 상인들이 사용한 것이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앙리케 왕자는 사그레스 항해학교를 세워 체계적인 항해술을 가르쳤다. 나침반과 천문 관측, 정확한 지도 제작 등으로 대양 항해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의학과 해부학

갈레노스 의학의 전승

로마 시대 의학자 갈레노스의 이론은 중세 내내 서양 의학의 토대였다. 그는 인체를 네 가지 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체액 불균형이 병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살리체토와 초우 등 중세 의학자들은 갈레노스 의학을 받아들이면서도 관찰과 경험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의과대학과 해부학

12세기 이후 유럽 각지에 의과대학이 세워지면서 의학 교육이 발전했다. 살레르노와 볼로냐, 몽펠리에, 파리 등에서 해부학과 외과학이 크게 진전을 이루었다. 13세기 볼로냐 대학에서는 인체 해부가 이루어졌으며, 14세기 몽펠리에와 파리에서는 정기적으로 해부 실습이 행해졌다. 해부학 지식이 축적되면서 의학은 한 단계 도약하게 되었다.

수술과 약초학

중세에는 사제와 수도사들이 의료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십자군 전쟁 시기에는 욕창병(성 안토니우스의 불)이 창궐했는데, 수도사들은 수술로 치료했다. 이는 외과 의술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수도원에서는 수많은 약초의 효능이 연구되었다. 의학자 힐데가르트는 약초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기술과 발명

농업 기술의 혁신

중세에는 삼포식 농법의 확산, 쟁기와 말굴레의 개량, 풍차와 제분 기술 등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 이는 수확량 증대와 노동력 절감을 가져와 인구 증가와 도시화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말의 힘을 이용한 범선 건조, 제지술의 발달 등 운송과 상업 발전에 기여했다.

건축 기술의 진보

중세 건축의 꽃이라 할 고딕 양식은 구조역학의 혁신을 동반했다. 뾰족 아치와 공중 버팀대 등을 이용해 높이를 높이고, 벽면을 얇게 하여 채광을 극대화했다. 거대한 대성당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건축 기술이 축적되었다. 또한 성곽 건축에는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수비 체계가 도입되었다.

화약과 화기

중세에는 중국에서 화약이 발명되어 군사 기술에 혁명을 가져왔다. 13세기 초 화약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는데, 이를 이용한 화포와 총통이 개발되었다. 14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때 대포가 사용된 것이 그 예다. 화약의 도입은 중세 봉건제 붕괴의 신호탄이 되었다. 기사도 전술이 무력화되고, 성곽도 무너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과학기술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체계적 이론이나 실험적 방법론이 부족했고,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에 사고가 제약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세인들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고대인의 유산을 발전시켜 근대 과학의 토양을 준비했다. 17세기 과학혁명의 주역이었던 갈릴레이와 뉴턴도 중세의 과학기술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중세는 과학 기술사의 암흑기가 아니라 근대로 가는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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