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의 건축은 기독교 신앙과 봉건제의 이념을 반영하는 거대한 기념비였다. 웅장한 대성당은 신의 영광을 찬양하고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한편 궁전과 성곽은 왕과 귀족의 권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전쟁과 침략으로부터 영토를 지키는 요새였다. 중세 건축은 그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 미학을 응축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10세기 말 석조 볼트 아치의 발명으로 시작되었다. 석조 볼트는 좁고 긴 통로 위에 반원형 천장을 얹은 구조로, 좌우 벽의 버팀으로 자중을 지탱한다. 이는 그간 화재의 위험이 있던 목조 지붕을 대체하며 건물에 높이와 규모, 견고함을 더해주었다. 석조 볼트는 로마네스크 성당의 내부 공간을 혁신하는 토대가 되었다.
성 미카엘 수도원 교회
1001년 완공된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수도원 교회는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의 걸작이다. 이 교회는 평면 구성에서 조화와 균형의 원리를 잘 구현하고 있다. 신랑측과 신부측이 마주 보며 대칭을 이루는 2층의 내진과 동쪽 끝 세 개의 반원 아프스는 인상적이다. 로마네스크 특유의 두껍고 투박한 벽체와 작은 창문도 이 건물의 묵직한 존재감을 더해준다.
피사의 대성당
1063년에서 1272년 사이에 건설된 피사 대성당은 그 독특한 양식으로 유명하다. 이슬람 건축과 고대 로마 건축의 영향이 융합된 것이다. 백색, 회색, 흑색의 대리석이 띠를 이루며 층층이 쌓인 외관은 매우 화려하고 경쾌한 인상을 준다. 반원형 아치가 도드라진 5층 구조의 종탑은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보기 드문 수직적 상승감을 자아낸다.
고딕 양식의 혁신
높이의 추구
12세기 중엽 생겨난 고딕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높이에 대한 도전이었다. 고딕 건축가들은 좀 더 높고 웅장한 성당을 지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를 가능케 한 혁신이 바로 널받이 아치와 공중 버팀대다. 좁고 뾰족한 모양의 널받이 아치는 벽에 가해지는 옆 힘을 분산시켜 건물을 높이 솟구치게 했다. 공중 버팀대는 벽에서 튀어나온 지지대로, 높이 올라갈수록 두꺼워지는 벽체의 무게를 받쳐주었다.
생드니 대성당
1163년 건설이 시작된 생드니 대성당은 초기 고딕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길이 103m, 높이 32m의 웅장한 규모가 압도적이다. 세 개의 현관과 두 개의 종탑은 수직과 수평의 조화를 이룬다. 천장을 받치는 네 개의 세장한 기둥은 고딕 건축 특유의 경쾌함과 우아함을 자아낸다. 성당 내부는 섬세한 소용돌이 무늬의 창과 빛의 유희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퀼른 대성당
1248년부터 1880년까지 632년에 걸쳐 완공된 독일 쾰른 대성당은 고딕 건축의 최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성당의 초고대 건축은 실로 놀라움 그 자체다. 길이 144m, 폭 86m, 높이 157m로 당대 최고의 규모를 자랑한다. 섬세하면서도 조화로운 비례, 화려하고 웅장한 장식은 숙련된 장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쾰른 대성당은 중세인의 종교적 열망과 기술적 재능이 빚어낸 기적이나 다름없다.
세속 건축의 발달
성의 건축
중세의 성은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영주와 가신들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였다. 성벽, 해자, 무너진탑 등의 방어 시설 안에는 중앙 홀, 침실, 경당, 부엌 등 다양한 건물이 자리했다. 성의 규모와 양식은 영주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윈저성, 프랑스의 루아르 계곡의 성들을 들 수 있다.
시청사와 길드홀
중세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시청사와 길드홀 같은 공공 건축도 등장했다. 시청사는 도시 자치권의 상징이자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브뤼셀, 브뤼헤, 루벵 등 저지대 국가의 시청사가 유명하다. 한편 수공업자 길드의 사무실이자 회관인 길드홀은 도시 상공인의 부와 영향력을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런던의 길드홀이 대표적이다.
대학 건축
중세 대학의 출현은 대학 건축의 시작을 알렸다. 초기의 대학 건물은 수도원이나 성당의 부속 건물로 시작했으나, 이내 독립적인 캠퍼스를 형성했다. 옥스퍼드 대학의 매그들렌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 등이 중세 대학 건축을 잘 보여준다. 고딕 양식의 경건함과 장중함이 학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듯하다.
동방 교회 건축
비잔틴 건축
비잔틴 제국의 건축은 서양 기독교 건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둥근 돔과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이 특징적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건축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거대한 중앙 돔은 신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 웅장하다. 벽면을 가득 메운 금빛 모자이크 그림은 현란하면서도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러시아 정교회 건축
러시아 정교회 건축은 비잔틴 건축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가장 큰 특징은 양파 모양의 둥근 지붕이다. 둥근 지붕은 눈이 많이 내리는 러시아의 기후에 적합한 것이기도 하다. 크렘린 궁전의 성당들, 성 바실리 성당 등이 유명하다. 다채로운 색상과 기하학적 문양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동방 기독교 건축의 영향
동방 기독교 건축은 이슬람 문화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초기 이슬람 사원의 둥근 돔은 비잔틴 건축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우마이야드 사원의 돔은 성 소피아 성당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후 성 소피아 성당이 모스크로 개조된 것은 동서 문화 교류의 상징적 사건이라 하겠다.
건축 기술의 혁신
아치와 둥근 천장
중세 건축가들은 빛을 신의 현존으로 여겼다. 고딕 건축의 혁신은 빛을 더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돌의 무게를 버티는 공중 버팀대 기술 덕분에 벽은 점점 얇아졌고, 창문은 점점 커졌다. 높이 솟은 색유리창은 신비로운 빛을 투과시켜 천상의 느낌을 주었다. 생드니 대성당의 장미창이 그 절정이었다.
석재 가공과 건축 장식
석재는 중세 건축의 핵심 재료였다. 석공들은 다양한 석재 가공 기법을 개발하여 섬세한 조각상과 부조를 만들어냈다. 기둥 머리의 장식, 창틀의 트레이서리, 버팀대의 피나클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노동이기도 했다. 건축 조각은 당대의 성경 해석과 세계관을 담은 일종의 텍스트였다.
중세 건축은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 인간사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총체적 예술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성당과 성, 시청사와 대학 건물에서 경외감을 느끼는 이유다. 웅장한 건축 양식 이면에는 신앙과 권력, 지식에 대한 열망이 있다. 중세의 건축가들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석재로 빚어내는 장인이었다. 중세 문명의 위대함이 응축된 건축 유산을 보노라면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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